세상 이야기

아코항구 3- 짧은 일기

광야의 들꽃 2021. 7. 21. 08:26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코의 또 다른 묘미는 지하터널을 걸어보는 데 있다.

1994년 하수구 고장으로 배관공을 불렀던 집주인 여성은 

화장실 공사 중에 사람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은 십자군 시대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게 된다.

우연히 아래로 떨어진 배관공에 의해 숨겨진 성전 기사단의 터널 벽이 발견된 것이다.

숨겨진 지하터널을 따라 밖으로 나오면  맑고 깨끗한 지중해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풍경이니 이곳은 해상 탈출을 시도한 장소인 것이 분명하다.

그전의 용도는 다른 이유 일수도 있으나 십자군이 패망할 즈음은 바다로 나가는

비밀 통로로  이용되었음이 분명한 곳이다.

정면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라면 옆 건물은 옛 아랍식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평범한 아랍식 주택 아래 십자군 시대의 터널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1994년 하수구 배관공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지하터널이 5년 후에는

관광객이 방문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변하게 되었다.

1999년 10월부터 150미터의 터널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2007년에는  입구가 양쪽으로 열리게 된다.

이스라엘 고대 유물 관리국에서는  터널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펌프를 이용한 수로 배관을 통해 물을 바다로 보내는 지속적인 관리를 한다.

고대 유물 관리국의 노력으로 관광객들은  지하 터널을 걸어 나와 신선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십자군의 요새는 아코의 서쪽에 자리하고 도시의 남서부에 주거 지역이 있어

전략적인 목적으로 동쪽의 항구와 요새를 연결하게 만든 특별한 지하통로이다.

성전 기사단 (템플 기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은 예루살렘이 이슬람 제국의 손에 넘어가자

아코로 이동해 요새를 짓고 상주하게 된다.

1104년   십자군이 아코를 정복한 후  1291년 패배해 물러갈 때까지 

아코는 팔레스타인 땅의 라틴왕국의 방어벽으로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성지를 방문하거나 전쟁을 하러 오는 모든 유럽인 들의 항구가 되어주었다.

성지 탈환의 꿈을 다시 실현시킨 십자군의 수도로 탈 바꿈 한 아코항구는 1291년까지 

유럽의 피사, 베니스, 제노아 등과 같은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다.

십자군 통치 2백 년 동안의 아코는 동서 문화교류의 상징이  되었다.

요한 기사단과 템플 기사단, 게르만 기사단의 진영이 구축되고 프랑스와 영국의 상인 숙소가 건설되었고

이슬람과 유대 상인들도 도시에 머무르게 되었다 한다.

공공건물이 많이 세워지고 요새화 된 건물 , 교회 , 목욕탕 , 제과점 , 성지순례자와

상인들을 위한 숙소 등이 시장을 형성하고 개인주택도 건설되었다 한다.

서부의 건축 양식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 양식으로 변화될 때

더 많은 궁전과 교회, 공공건물이 건축되었다 한다.

학자들은 최근의 고고학 발굴을 통해 양식의 변화 추이와 

13세기 최초의 고딕 양식의 확립을 볼 수 있는 건물을 발견 하였다 한다.

시대적 상황들을 잘 설명해주는 벽화들이다.

십자군 요새 입구 정원이다. 코로나 시대 이전의 매표소가 있던 곳이다.

성채 내부에서는  옛 모습을 벽화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코로나 시대 이전에는 예술가들의 공방과 타임트랙 기기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발상이었는데 다시 그 시대가 오려나? 슬쩍 궁금해진다.

밖으로 나와 광장에 서니  십자군 시대의 공중 화장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 관람객이 서있다.

사진에는 없지만 십자군 시대의 화장실도 로마시대처럼  작은 홀에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고 물론 수세식이다. 세척을 위해서는 토끼털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십자군이 패망할 즈음의 아코의 인구는 4만 5천으로 추산되는데

군대는 1만 4천 명에 앙리 2세의 지원군 2천 명이 더해졌다고 한다.

마멜룩(중세 때 여러 이슬람 국가들의 통제권을 장악했던 노예 군단의 병사, 맘루크 장군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1250년부터 1517년 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한 왕조를 세웠다.) 군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신뢰할만한 자료는 없지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22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실제 군세는 이보다 훨씬 적은 3만에서 7만 명으로 추산한다고 한다.

1291년 아코 공방전으로 십자군의 패망이 일어나는데 주력 병력이 성전기사단 , 튜튼 기사단, 구호 기사단,

템플 기사단 , 성 토마스 기사단의 병력으로 약 1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하니 그 상황이 몹시 어려웠으나 

성벽이 견고해 방어가 가능했었다 한다.

그러나 탑들이 무너지면서 구호 기사 단장이  중상을 입고 키프로스로 대피하면서 아코는 무너지게 된다.

아코 공성전은 4월 6일에 시작하여 5월 18일에 도시가 함락되면서 끝이 났다.

십자군의 도시는  무너져 내리고 항구 주변의 건물 몇 채만 남고 완전히 파괴되고 방치된다.

오스만 터키의 새로운 제국이 18세기에  십자군 시대의 터 위에  건설되면서

오히려 유적이 보존될 수 있었다.

 

성채 안에 새롭게 발굴된 과거의 유적들은 이 도시가 얼마나 오래된 도시인지 알려주는 척도가 된다.

십자군 성채 내 에서도 지하 터널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터널은 정말 하수구로 사용했던 터널이다.

코로나로 인해 지하 성당으로  내려가는 길은 출입 금지 구역이 되었다. 아마도 보수 중 인듯하다.

 

 

 

 

십자군 성채 내부로 들어서면 이곳의 발굴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는 안내문과 모형도가 있다.

 

건물의 벽을 통해 시대의 변화와 보수의 흔적을 볼 수가 있다.

십자군 성채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오른쪽 위의 하얀 건물층이 감옥 건물이다.

18세기의 건축물과 중세 건축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히잡을 쓴 아랍 여학생들이 야외 수업을 나왔는지 밖이 소란스럽다.

십자군 성채 내부 모습을 돌아본다.
성지 200년 십자군 통치의 처음과 끝이
아코 항구 일 것이다.
성지로 들어오는 관문이 아코 항구이고
성지를 탈출해 나가는 지역도 아코 항구이다.
성지 이스라엘 십자군의 모든 것.
아코 십자군 성채를 조명해 본다.

참고: 1. 유네스코 유산 사이트

       2. 사이언스 타임지 

       3. 나무 위키

       4, Tourist Israel.com

       5. 작은 형제회 성지 대표부  관구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