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뿌리를 찾아 서 3- 시 아버님 의 고향 (키르 클라레리 kirklareli )

광야의 들꽃 2010. 6. 6. 01:00

시골 소년의 작은 마을을 기대하고 찾아오는 우리들에게   안내판이 알려주는 내용은 완전

상상을  초월 합니다. 2009년 도에 이미 인구 6만 4천2백65명이었다 고 하니 이 안내판도

벌써   그 이전의 것 이 분명 합니다.

 

  에디르네 에서 30여 킬로 미터 떨어진 이곳은  이스탄불 철도와 지선으로 연결되어

 낙농제품 ,담배,곡류 등을 거래하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라고 합니다.

 

 

 지금은 큰 도시로 변해 버린 이 키르 클라레리 에서 들은 기억에 의존해서 옛 장소를

 찾아 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옛 도시를 중심 으로 신 시가지를 만 든  이 곳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결국  우리에게  과거를 보여주고 맙니다.

 14 세기의 사진으로 보아도 이곳은 그대로입니다.

 

 나의 시 아버님의 가족들이 다니셨던 터어키식 목욕탕(hamam 하맘 )입니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지만  이용자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이  과거와 현재의 목욕탕의 모습은  이제는  퇴색될 

 과거의 유물로만 남게 될 것처럼 보입니다.

 

 14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 목욕탕 은   1683 년 에서 1704년 에   하 씨 후세인 아카 에 의해  보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여탕을 나서면 바로 옆 건물인 상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이곳 경제의  중심이었을 터어키식 전통 시장을 기대한 우리들 에게

  시장 안에는 겨우 가게가 서너 개 뿐입니다.

  반대 편으로  나오니 하맘( 터어키식 목욕탕 )의

  남자 쪽 입구입니다.   

  전통 시장 건물을 중심으로 목 욕탕이  연결되어 있는 건물입니다. 

 

 오래된 히지르 베이 하맘 (1383 )과 그 근처에  있는  히지르 베이 사원이

 오스만 터어키 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이  지방의  유물인 듯 보입니다. 

 사원과 시장과   하맘 과의 조화라니 이슬람 국가에   걸맞은  도시 구조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사원과 시장과  목욕탕을 찾았던 이유는

   바로 이 사탕 가게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시 할아버님이  과거에 운영하셨던 사탕 공장과  가게를 찾아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터어키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가게 주인 이 바뀌어도 그곳에 업종 변경을

   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거리에  있는  유일 한 사탕 가게입니다.

  시 아버님께서는 어릴 적 에 추억으로  이사탕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이야기들도 이 거리와 관계된 것입니다.

  이 건물 뒤에는 유대교 회당 이 있다고 합니다.

  추억의 사탕을  몇 봉지  구입한 우리들은 뒷집인 유대교 회당으로 향 해 봅니다.

 

 

  

 

   어린 미트라니  요셉 씨가   뛰놀았던  이 거리에는   사탕 공장  없는

   사탕 가게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곳이 유대인 들의 중심지 이었나  봅니다.

  회당은 항상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중심지에 자리합니다. 

 

 1934 년 트라키아 포그 롬 ( pogrom -   파괴  학살을 뜻하는 러시아 말 :종교 인종

 민족적으로 소수인  사람들과 그 재산에 대해 군중들이    당국의 묵인이나 허가 아래 가하는

 공격을  말함 -주로 러시아 인의 유대인 공격 )  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이곳 에

 약 3000명의 유대인 공동 체가 있었으나  포그롬 때

 모두 이스탄불로  이동해 갔다고  합니다.

 시 아버님 가족도  이때 원하지 않는 이동을 하게 되신 것입니다.

 1920년 생 이신 시 아버님이 14살 때의  일이니  그때부터 사탕 가게의 달콤한 인생은

 사라지고 대도시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고달픈 인생이  시작  되었다고 합니다.

 

 

 

  오 늘날에는 단 세명의 유대인이 이곳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중 한 명이 회당을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은 다른 유대인을 찾아 나서는 일행 들의 모습입니다..

 시 아버님의 어린 시절 중에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과의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보려 했더니

 그 학교는 이미 이곳에서 지진으로 파괴되고 없다고 합니다.

 섭섭합니다.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 사라진다는 것 은 서글픈 일입니다.

 

  유대인 들은 성인식을 지내면 성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이 된  14살 이후의 시아버님의 애환이 서린 이스탄불로 상경했습니다. 

  이곳에서도 유대인들의 흔적을 잠시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버스를 타고 과거의 유적지를 찾아보는 것처럼 

                          이번에는  

                 기억속의 시아버님과

         그분이 들려주신  이야기  안에 들어있는  

     과거의 추억을 찾아  달려본  여행입니다.           

   이스탄불의 구 시가지가  차창 밖으로 보입니다.

 

 저곳 에는 얼마나 많은 숨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