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땅 , 성경의 땅

요타 파타( Jotafata),요드팟 (Yodfat)갈릴리 요새

광야의 들꽃 2020. 12. 13. 04:47

이스라엘은 기원전 63년 이후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살고 있었다.

헤롯 대왕을 왕으로 세우고 유다를 통치 했으나 

그가 죽자 로마 총독의 직할 지배를 받는다.

가이사리아의 폭동(기원후 66년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싸움으로 삽시간에 유대인 2만 명이 집단 학살을 당한 사건 )

으로 시작된 유대인들의 반란은 유대전쟁으로 이어지고 결국 로마 황제 네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베스파니아누스 장군을  파견한다.

이때 예루살렘의 지도층은 젊은 제사장 가문의 요셉 벤 마타티야후를  갈릴리의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요셉  벤 마타티야후 , 그가 바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이다.

오늘의 탐방 장소는 바로 요세푸스의 변절? 과 투항?  자기 합리화? 신의 계시? 가 함께  일어났던 

요타파타  전투의 갈릴리 요새이다.

"유대 국을 창조하신 분 께서 유대 국을 낮추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그분께서 이 불쌍한 영혼을 

선택하여 미래사를 예언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기쁜 뜻이라면 저는 기꺼이 로마인들의 

화해를 받아들여 목숨을 구하는 것을 족하게 여기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여기서 로마인들에게 투항하는 것이 유대를 배반한 변절자로서가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일꾼으로서 임을 명백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3권 8:3)

 

"베스파니아누스와  로마군은 도시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남자를 죽였다. (4만 명 )

여자들과 아이들은 포로로 잡았다.(1200명)

도시는 베스파니아누스의 명으로 완전히 부서지고 불에 타게 되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 사, 3권 7:36)

요타파타는 네로 제위 제13년 파네무스 ( 타무즈 , Panemus , Tamuz)월  1일에 함락되었다.

"베스파니아누스는  요세푸스를 생포하기를 원했다.

요세푸스는 요타파타가 로마의 손에 들어갔을 때 어떤 초 자연적인 섭리의 도움을 받았다.

깊은 구덩이로 피신하였는데 동굴이 있어 지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이미 40여 명의 유력 인사가 몸을 숨기고 있었고 

여러 날 버틸 수 있는 식량도 비축되어 있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3권 8:1)

아마도 이런 물 저장소가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여름에 비가 오지 않는 이스라엘은 우기인 겨울동안 물을 저장소에 모아야 합니다.

그 물은 다음 우기 때까지 식수로 사용하게 됩니다.

삼일 이 지난 다음에 함께 숨어 있던 어떤 여인이 체포되고 은신처가 들통이 나자 

베스파니아누스는  두 군단의 지휘관을 보내 투항을 권고합니다.

"우리도 우리 조상의 명예를 더럽히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 여기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하십시오. 우리 손에 죽겠소? 아니면 이 칼로 자결하겠소? "(유대 전쟁사 3권 8:4)

함께 숨어 있던 다른 유대인들은 이렇게 투항의 권고를 받은 요세푸스에게  말했습니다.

"이 칼로 자결하신 다면 당신은 유대인의 장군답게 최후를 장식하게 될 것이고 

아니면 우리들 손에 의해 배신자의 최후를 맞게 될 것 이요"(유대 전쟁사 3권 8:4중에서 )

올리브기름을 짜던 이런 동굴이었을까요? 오늘도 번민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들의 대사는 마사다 항전 마지막 밤에 엘리에제르 장군의 절규와도 같습니다.

결국 요세푸스는 그 특유의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시켜 제비를 뽑아 죽는 방법을 택하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설득하여 투항하는 데 성공합니다. 우연인지 섭리인지....

그리고 베스파니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예언을 합니다. "당신들은 카이사르가 될 것입니다."

우연인지 섭리인지 그의 예언은 이루어 집니다. 

그때부터 요셉 벤 마타티야후는  로마 황제의 성씨를 부여받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됩니다.

역사가가 되어서 유대 역사와 유대 전쟁사를 집필하게 되는 것 입니다.

"사방이 깊고 가파른 절벽으로 구성된 벼랑 위의 도시 요타파타는 일종의 난공불락의 요새였는데 

지형적 불리함과 유대인의 완강한 저항을 극복하고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  베스파니아누스는

성벽 맞은편에 토성을 쌓기로 의견을 모으고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유대 전쟁사 3권 참고 )

47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은 유대인 변절자의 투항으로

한 밤중에 자고 있다가 요타파타는 함락되고 맙니다.

고대 근동의 역사를 통해 내부자들의 반란이  항상 나라의 패망으로 이어지는데 

요타파타의 운명도 변절자의 내부 고발로 결말을 맞게 됩니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발견된 돌에는 타무즈 달을 나타내는 게의 문양과 묘비를 나타내는 문양이

양면으로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요타파타의 어느 주민이 미리 그날을 예언한 것입니다.

적막감이 감도는 이 역사의 현장에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도 한 무리의 안내자 연수팀과 부부 등산객 ,

그리고 야외학습 중인 학생 한 단체를 보았을 뿐입니다.

역사의 현장 요타파타에는 오늘날 1960년에 건설된

요트 팟 모샤브 쉬투피 (키브츠와 모샤브의 장점을 가진  마을 공동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2019년 기준 908명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

내게 무거운 3권의 책(유대 고대사와 전쟁사)을 선물해준 고마운 친구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그녀를 대신하여 2020년 7월 7일에 요타파타를 방문했고 오늘 12월12일에 방문기를 기록합니다.

코로나 비대면 시대를 살면서 함께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나중으로 미루며

오늘은 나의 탐방기에 잠시 머물렀다 가기를 바랍니다.

참고 :1, 입장료는 없습니다.(아직은 )

       2. 화장실도 없습니다.(아직은 ), 허허벌판 입니다.

       3. 탐방기 참고문헌은 위키 피디아, 유대전쟁사 (생명의 말씀사),현장 설명서 , 입니다.